인생 얘기 들으러 오지 마세요

혼정빵 관리자에서 은퇴하며

cecilejiwoo 2020. 9. 14. 20:03

오늘, 나는 지난 9월 20일부터 시작해온 오늘 혼정빵은 페이지의 관리를 그만두었다. 

 

시작은 단순했다. 나는 모든 자습시간을 식당에서 보냈고, 나는 매일 혼정빵을 먹었고, 나는 혼정이 끝날때마다 지혼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여학생들이 ‘오늘 빵 뭔지 알아?’라고 서로에게 묻는 것을 들어왔다. 당연하게도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혼정에 가기 전에 식당에서 미리 빵이 무엇인지를 확인한 사람, 즉 나 혼자였다. 

 

이 독특하고 하등의 쓸모도 없는 능력을 페이지를 만들어가면서까지 활용하려 한 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다. 관심을 받고 싶어서 만들었다. 현실에서 별로 안 친한 사람에게 ‘오늘 빵은 뭐뭐야’라고 말해줄 의지는 없지만 항상 엘리베이터를 가득 채우는 똑같은 질문에는 짜증을 느꼈고, 그렇잖아도 쓰잘데기 없는 페이지가 하루에 하나씩 개설되어서 친목의 용도로 사용되는 마당에 나라고 못할거 뭐 있나 싶었다. 

 

페이스북 페이지 관리자가 되면 각 게시물이 몇 명의 타임라인에 나타났는지, 라이크 수와 댓글 수는 어떻게 되는지 분석할 수 있다. 첫 게시물은 총 171명이 봤다고 한다. 요즘은 기본 350명, 조금 많을때는 400명 정도 본다. 졸업생 라이크도 있고 부계 라이크도 있는 걸 고려해본다 해도, 어쨌든 전교생의 2/3 정도가 보는거다. 그러나 그 중 내가 혼정빵 관리자인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었을까. 여기저기서 알음알음 들어서 알게 된 사람이야 많겠지만, 처음부터 내가 관리자라고 추측한 사람은 별로 없었으리라 믿는다. 

 

현실에서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내 의견을 강하게 표출하거나 시위에 참가하거나 연설을 하는데에는 별 취미가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혼정빵 페이지를 통해서 나는 이상하게 내게 권력이 주어지는 것을 느꼈다. 맛있는 빵이 나온 날에는 식당에 닿기도 전에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즐거운 탄성을 들을 수 있었다. 빵이 맛없다고 쓴 날이면 아쉬운 표정으로 그냥 방에 가야겠다고 선언하는 학생들을 만났다. 전날에 맛있는 빵이 나와서 45분이 되기도 전에 빵이 다 떨어진 것을 보고 그 다음날에는 양심적으로 하나씩만 가져가달라고 썼더니, 도넛이 나왔음에도 45분이 넘어서까지 빵이 남아있었다. 물론 이 모든 변화들이 페이지 하나 때문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빵이 맛없는 날이면 내가 미리 페이지에 공지하지 않아도 학생들은 알아서 빵을 안 받고, 양심적으로 하나씩만 가져가라고 했던 그 도넛이 사실 많은 학생들의 입맛에 안 맞았을수도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엘리베이터에서의 그 모든 중얼거림을 조용히 관찰한 사람으로서 나는 매번 권력의 환상을 느꼈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혼정빵을 미리 확인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보며 조용히 비웃을 수 있는 권리가 생긴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즐거운 기분이었다. 혼정빵 페이지를 통해 내가 얻은 것은 라이크, 인싸 체험, 1자에 잠을 자지 않고 식당에 가서 공부해야 한다는 의무감, 빵을 가장 먼저 먹을수 있는 권리, 이런 것들이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분야에서 사람을 자극하는 선동의 힘이었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살아있었던 교복 공론화가, 혹은 귀가 찬반 설문이, 빵처럼 접근하기 쉬운 주제였다면 참 많은 사람들을 선동할 수 있었을텐데. 선동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조금 웃기긴 하다. 교복이나 코로나 시대의 귀가 문제는 선동과 세뇌가 아니라 설득이 필요한 분야니까. 사람들은 빵과 같이 아주 기본적인 것 - 교복이 편하냐 아니냐, 귀가를 해서 치킨을 먹을수 있냐 혹은 못 먹냐 - 에 놀라우리만치 민감하다. 우리가 죽음과 삶, 학문과 생각에 민감했다면 엘리베이터에서 내가 듣는 중얼거림은 ‘오늘 빵 뭐야?’가 아니라 ‘사람은 왜 살까?’였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분야에서 가장 쉽게 선동된다. 별다른 고찰 없이 그런가보다, 하고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교복 치마가 길어서 불편해? 치마 자르면 편해? 길이 줄이면 되네!” “치킨 먹고싶어? 귀가하면 먹을수 있어? 가자!” 이런 특성에 맞서서 반대 방향의 선동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똑같이 가장 기본적인 분야로 접근하면 된다. 

 

지난 귀가설문이 이루어질 때 나는 스토리에 귀가 반대를 해야 하는 이유를 나열해 올렸다. 식당에서 공부 가능, 동아리 모임 가능, 자율배식 가능.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이유다. 코로나의 위험성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화하는 것의 당위성과 도덕적 의미와... 이런 것 따위 없다. 그냥 편한 곳에서 공부할수 있으니까, 친구들 만날 수 있으니까, 밥 편하게 먹을 수 있으니까… 그것이 유일한 이유였다. 그리고 몇몇 학생들이 신기하게도 동조해주었다. 심지어 나랑 친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이에 근자감을 얻은 나는 길가에 나가 지나가는 사람을 하나하나 붙잡고 ‘야 귀가 안하는거 어때?’하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 중 한 친구와의 대화가 기억이 난다. 

 

“귀가 안하는거 어때? 야 솔직히 시험기간에 식당에서 같이 공부하는거 편하잖아.”

“그래 미술사는 식당이 좀 필요하긴 하더라.”

“그래! 그러니까 귀가 반대 설문하자.”

“아 그런데 이미 했는데… 다시 하기 귀찮아.”

 

결국 도덕의 문제가 아닌 어느 쪽이 더 편한가의 문제일 뿐이다. 오늘 전체공지 체온측정 관련 글에 장문의 댓글을 달면서도, 나와 다른 2,3학년과 1학년들 모두 결국은 자기 편한 쪽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멋있는 논리를 핑계로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이기심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그저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느냐의 차이 하나뿐이지 아닐까. 나 혼자를 위한 것인지 다수를 위한 것인지. 너무나 단순한 욕구에 가장 쉽게 휘둘리는 사람인 우리는 그 기본적 욕구를 통해 우리가 더 큰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지, 혹은 단순히 기본적 욕구의 상태로만 남아있는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나는 더 이상 이 선동의 권력을 위해 페이지를 계속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미 혼정빵이 가지는 정치적인 의미를 깨달았고, 그것을 경우에 따라 적재적소에 활용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이미 나는 혼정빵 페이지 관리자로서의 귀찮은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었다. 새로운 관리자가 된 24기 친구는 그 의미를 알고 있을런지 모르겠다. 그 친구도 아마 은퇴할 즈음이면 그 힘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요즘의 혼정빵은 죽은 빵이다. 더 이상 지혼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빵이 무엇인지 묻는 매일매일의 관습은 찾아볼 수 없고, 아마 올해 안으로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이다. 식당에서 공부하며 매일 김대기 선생님께서 올라오시는 8시 45분을 기다리는 설레는 마음 역시 기껏해야 한 달에 2주씩만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이제 3학년인 나는 더 이상 혼정빵에서 하루의 행복을 찾기에는 너무 마음이 피폐해져감을 가끔 느낀다. 혼정빵 페이지의 권력은 엘리베이터에서의 속삭임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지금의 페이지는 보는 이에게도 관리하는 이에게도 존재의 목적이 없다. 그저 과거의 혼정빵 문화에 대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 뿐. 그럼에도 페이지를 유지하는 것은 여전히 350명의 페이스북 계정들에게 혼정빵의 권력이 남아있다는 착각을 주기 위해서이다. 혼정빵은 어쨌든 선동의 힘 빼면 시체니까. 

 

다시 혼정빵 문화가 돌아오는 날까지 관리자는 환상을 지켜줄 것이라 믿는다.